TV조선의 '박근혜 의상실 CCTV 뒤늦은 보도' 배경

 

앞서 방상훈 사장이 언급한 "(박근혜 의상실 CCTV가) 박근혜와 최순실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것 외에 뭘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해명은 최순실 관련 선행보도가 없는 상태에서라면 틀린 얘기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설령 최순실 이름이 등장하기 전엔 그렇게 오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2016년 9월 20일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을 최순실과 연결 짓는 기사(K스포츠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를 쓴 뒤에는 박근혜 의상실 CCTV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몰랐을 리가 없다. 특히 당시 한겨레 기자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하 김의겸)은 2016년 9월 28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라는 제목을 단 한겨레 신문 ‘편집국에서‘라는 칼럼에서 “저희가 (TV)조선의 뒤를 좇다보니 ‘잃어버린 고리’가 두세개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건의 전체 모자이크를 끼워맞출 수 있는 ‘결정타’들이죠. 조선이 물증을 확보한 듯한데 보도는 실종됐습니다. 기사는 언제 햇빛을 보게 될까요.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힘 빠졌을 때라면 가치가 있을까요?"라고까지 썼다. 

방상훈 "박근혜 의상실CCTV 의미 잘 몰랐다" 해명은 모순

지난 2016년 10월 25일 TV조선 보도화면 캡처.
지난 2016년 10월 25일 TV조선 보도화면 캡처.

사실 김의겸은 내가 갖고 있던 CCTV영상에 어떤 내용물이 담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박근혜와 비선실세 최순실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동영상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 나와 김의겸 두 사람을 같이 알던 법조인 A가 김의겸에게 ‘미르와 K스포츠재단 배후가 최순실’이라는 핵심 정보를 전달할 당시 '동영상 같은 것도 있다'는 것까지 얘기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6년 9월 2일 나를 취재하러 온 김의겸을 종로에서 만났을 때 나는 '물증(동영상)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 김의겸이 칼럼에서 “조선이 물증을 확보한 듯 한데, 보도는 실종됐습니다”라고 쓴 부분은 바로 ‘박근혜 의상실 CCTV' 동영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처럼 한겨레가 친절하게 TV조선이 쥔 물건이 ‘결정타’라고 까지 알려준 상황에서 보면 방상훈 사장의 해명은 ‘모순’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일 수 밖에 없다. 박근혜 권력의 위협에 굴복해 ‘최순실 보도’에 제동을 걸었다는 본질적 상황이 바뀔 순 없다. TV조선의 후속 보도는 8월 18일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최순실 보도의 빗장이 풀린 2016년 10월 25일 밤 TV조선 메인 뉴스에서 쏟아낸 최순실 관련 특종과 단독 리포트들은 이미 취재 완료된 상태로 대기중이었던 것들이었다. 당일 최순실 관련 리포트만 30분가량 16개였고, 이 가운데 <특종 또는 단독> 아이템은 10개나 됐다. 그 후 며칠 동안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는데,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면 상당 부분 8월 말부터 나갔어야 할 보도들이었다.

청와대로부터 "부패기득권 세력"이란 비판을 받은 시점(8월 21일)과 후속 보도 중단 시점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것도 ‘박근혜 청와대의 위협과 조선의 굴복’이라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가 CCTV영상 보도를 뒤로 돌린 건, 먼저 꺼내들었다가 제동이 걸리면 다른 기사까지 못쓰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게 1차적이었다. 하지만 앞선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를 쓸 때는 이 이유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지 않았다. 자칫 회사와 윗 사람을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질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이유, “처음에 CCTV영상부터 쓰게 되면 화제야 되겠지만 박근혜-최순실 관계만 부각돼 국정농단이라는 본질이 가려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CCTV를 뒤로 돌렸다”는 이유만 부각했다. 
※ 박근혜 의상실 CCTV를 손에 넣게 된 과정과 1년 6개월 동안 홀로 가지고 있게 된 내막, CCTV영상을 보도 후순위로 미룬 배경 등은 후술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기사 진행 순서도 안종범 김종 차은택 김종덕 김상률 등 국정농단의 조연들을 먼저 한명씩 등장 시키는 보도를 하고, 그 다음에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금에 청와대와 비선 실세가 개입돼 있다는 것까지 치밀하게 탐사보도를 했다. 그게 2016년 8월 18일까지 상황이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이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배후로 ‘최순실’을 등장시키고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로 박근혜 의상실CCTV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이 단계에서 CCTV가 나왔을 때는 단순히 “최순실이 박근혜와 친하다”는 정도의 설명을 해주는 게 아니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게이트로 폭발시키는 뇌관에 해당하는 보도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는 기자로서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협박은 방상훈 사장 주변에 집중돼 있었고, TV조선 재허가 여부도 핵심 위협 수단이었다. 책에서는 조선과 TV조선의 상층부가 CCTV영상 보도에 제동을 걸었던 이유에 대해 “짐작해보면 CCTV영상을 보도하느냐 마느냐의 지점에서 기자들과 회사 상층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렸다고 생각한다”고 기술했다.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 268p / 이진동, 개마고원)

기자들은 ‘언론’ 입장에서 보도를 하려고 하는데, 상층부는 ‘회사적 시각’에서 제동을 걸었던 것처럼 지극히 표피적인 설명을 했다. 직설적이고 알기 쉽게 “사장과 조선일보가 굴복한 결과였다”고 써야 했으나. 이 역시 내부에 몸담고 있던 처지인지라 에둘러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일보가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고 스스로 부족했던 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도 책에서는 완곡하게 표현했다.  
“아쉬웠던 건, 내부 청문회나 내부 조사를 하려했으면 취재 과정만 들여다볼게 아니라, 2016년 7~10월의 상황도 되짚어 봤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TV조선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을 집중보도할 때 조선일보는 왜 나서지 않았는지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 339p / 이진동, 개마고원)   

차라리 당시 박근혜의 치졸하고 무도한 협박과 위협에 회사를 경영하는 사주로서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게 현실적 상황이었다고 말했다면 나 또한 안타깝지만 충분히 긍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조선일보는 '무오류의 신'처럼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방 사장이 옹색한 해명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순실 보도' 제동으로 '박근혜 의상실CCTV 보도' 못해 

언론이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이 권력을 휘두르면 언론이라고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민주적 정치 보다는 권위주의적 통치에 익숙했던 박근혜 청와대가 권력을 시대착오적으로 휘두르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는 ’할말은 하는 신문‘이니, ‘물러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강변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한국일보에서도 12년의 기자 생활을 했다. 한국일보는 '기자 중심'의 조직인데 반해, 조선미디어는 철저히 '오너'중심의 언론사라 사주는 제왕에 가깝다. 오너가 있는 언론사 내부 조직 특성상 충성심이 없으면 상층부 진입도 되지 않기 때문에 방상훈 사장의 말처럼 '기자가 엎어버리고 쓴다는 것‘은 조선일보에선 말로나 가능한 얘기일 뿐이다. 그나마 조선일보는 각 부장에게 할당 지면에 대한 재량권이라도 있지만, TV조선에선 뉴스 편성의 최종 관문이 보도본부장 한 사람에게 장악돼 있어 시스템상 이를 피해 뉴스를 내보낼 수 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사장이 직접 '최순실'을 보도 금기어로 정해놓은 상황에서 그 관문을 통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지난 2012년 10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 출범 1주년 리셉션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축사를 하는 동안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맨 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지난 2012년 10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 출범 1주년 리셉션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축사를 하는 동안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맨 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나는 책에서 윗 사람 탓을 했던 게 아니라, 그 당시 최순실 기사’에 제동을 걸고 나올 때 내가 겪었던 객관적 상황을 기술한 것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부장단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박근혜 의상실 CCTV‘ 영상과 자료를 외부에서 공개할 생각까지 했을까. 

심지어 당시 보도본부장에게 “회사를 위태롭게 한 책임을 물어 조선일보 편집국 책임자 교체를 사장에게 건의해야한다”는 얘기를 두 차례나 꺼냈다. 이유는 조선일보가 미르·K스포츠재단 기사를 외면 또는 무시함으로써 오히려 박근혜 청와대의 공격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우병우 기사’ 때문인 줄 알고 있었지만, 조선일보가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을 이슈화하지 못하게 하려고 청와대가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게 당시 나의 상황 인식이었다.  

나와 펭귄팀(TV조선 국정농단 사건 취재팀)이 TV조선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기사만 20일 가까이 이어가는데도 조선일보는 기사 한 줄 내지 않았다. 얼핏 ‘TV조선 보도를 조선일보가 따라갈 수야 없지’라는 자존심 때문으로 짐작했을 뿐, 당시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당시는 '최순실' 금기어 지시가 있었다는 걸 알 턱이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일보가 미르·K스포츠재단 기사를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박근혜 청와대는 얕보기 시작했고, 한번 밀린 조선일보는 박근혜 청와대에 뒷덜미가 잡힌 격이 됐던 것이다. 

본부장이 건의를 전달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일보 편집국 책임자가 알게 되면 가만 둘리 없다는 점에서, 사실 나로서도 보통 각오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다 던지다시피 취재하는 내 입장에선 무기력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당시 나는 언론으로서 정도가 답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이 언론을 궁지로 몰수록 ‘언론의 본분과 정도’를 무기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 238p / 이진동, 개마고원)
그래서 대표이사까지 찾아가 “평소 특종을 주문하지 않았느냐. 언론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며 ‘최순실 기사’를 써야 한다고 설득까지 했었다.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 237~238p / 이진동, 개마고원)

뿐만 아니라 “대통령 권력이 ‘언론’을 쥐락 펴락 힘으로 눌러, 언론사들이 못나서면 ‘기자 연합군’이라도 만들어보겠다”고 나섰을까. (책 <이렇게 시작되었다> 254p / 이진동, 개마고원)

기사를 내야 할 타이밍에 맞추지 못한 것은 기자로서 아쉬운 대목이지만, 사안의 성격상 보수 정권에서 국정농단 사건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던 건 보수색채 언론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에서 쓰고자 했던 바도 윗 사람 핑계가 아니라 보수지향성에 묶여 있던 조선의 한계였다.  

매체 성향을 역주행하는 보도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일이라 순탄하게 진행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펭귄팀의 1차 목표는 “국민들이 최순실의 국정농단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사건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정국에서 박근혜 의상실 CCTV나 미리 취재해 갖고 있던 최순실 인터뷰의 보도 타이밍이 한 박자 늦은 것은 맞지만, 나와 펭귄팀은 기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후회하는 지점은 나와 펭귄팀을 분리하는 인사를 하고 명백하게 제동을 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 혼자라도 해보겠다고 뛰쳐나갔다가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믿어달라'는 말만 믿고 회군을 한 지점이었다. 지금은 결론이 다 난 상태에서 뒤돌아 조망해보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 한치 앞을 내다 보기 힘든 국면에서 순간순간 판단을 해야했기 때문에  분명 '아차' 싶었던 대목도 있다.

조선, 진보 정권과는 '적대적 공생' 관계 형성 
지지층 겹친 박근혜 정권 탄압에는 맥못춰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권력에 당당한 신문’이라며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던 조선일보는 왜 같은 보수 성향의 대통령 권력 박근혜 앞에서는 물러섰을까? 

언론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비판 감시라면 언론과 권력의 바람직한 관계는 팽팽한 ‘긴장 관계’이다. 조선일보는 상대적으로 진보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긴장관계를 넘어 진영적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비판의 선을 넘어 비난으로 흐르기도 했고, 때로는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 하지 않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적대적 공생’관계였다. 정권 입장에서는 보수 언론 권력의 정점과 날카로운 대립 관계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한 반면, 조선일보는 반대로 보수 독자층을 견고하게 묶었다.

소위 진보 정권에서 ‘안티 조선’의 흐름도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 조선의 독자는 더 늘었다. 조선은 진보 성향 정권과의 적대 관계를 통해 ‘잃는 것 보다 얻는게 많다’는 셈을 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보수 기득권 정당이 대리전을 치러줬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권력과 같은 방향을 보고 갈 때의 ‘위세’는 못 누려도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응하는 박근혜 정권과의 갈등 국면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맥없이 주저 앉았다. ‘독자층’이 흔들리고, 정치적으로 지지를 했던 세력도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일보를 떠받쳤던 보수 정치 세력 중 ‘친박’은 박근혜 청와대의 공격 신호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니 단기간이지만 조선일보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박근혜가 조선일보에 대놓고 ‘부패 기득권 세력’이라고 몰아세워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맞설 동력과 지지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선일보의 ‘권력에 당당한 신문’ 모토는 반대 진영에만 적용되는 ‘정치적 표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게 ‘최순실 금기어 사태’였다. 

사정기관을 앞세운 권위주의적 통치와 ‘불통’으로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데, 지지 기반이 같은 조선일보와의 막장 갈등은 그 시간을 앞당겼고, 레임덕 정도로 끝날 일을 탄핵으로 키운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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