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행정관, 흰 와이셔츠에 휴대전화 닦아 최순실에 건네주던 장면 담겨

TV조선 '박근혜 의상실 CCTV' 보도 화면 캡처. (사진=TV조선 캡처)
TV조선 '박근혜 의상실 CCTV' 보도 화면 캡처. (사진=TV조선 캡처)

2016년 촛불정국과 이어진 대통령 탄핵 사건을 떠올릴 때 일반인의 뇌리엔 청와대의 젊은 행정관이 휴대전화를 최서원(개명전 최순실)에게 바꿔주면서 휴대폰 화면을 흰 와이셔츠에 닦은 뒤 공손하게 두 손으로 건네주는 장면이 꽤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 입을 의상을 챙기고, 청와대 행정관들이 최순실을 극진하게 상전 대하듯 하는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겼던 바로 ‘박근혜 의상실 CCTV영상’이다. 이 영상은 공개되자마자 큰 화제가 됐고, 촛불정국에서 종편 채널과 지상파 방송에 지겹다싶을 정도로 숱하게 나왔다. 

2016년 10월 25일 보도된 박근혜 의상실CCTV영상은 전날(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와 함께 국정농단 보도의 상징성 있는 장면이었고, 언론의 국정농단 보도를 촛불로 이어지게 한 도화선이자 촛불정국으로 넘어가는 가교역할을 했다.

2016년 7월 '미르·K스포츠재단'보도 탄핵사건의 시발점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5년 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측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헌정사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심판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문의 첫 머리는 “미르·K스포츠재단이 설립될 때 청와대가 개입하여 대기업으로부터 500억원 이상을 모금했다는 언론보도가 2016년 7월경에 있었다”로 시작한다. 언론의 국정농단 사건 보도로 촉발된 촛불정국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특검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 그리고 헌재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헌법재판소는 이런 흐름의 시발점을  2016년 7월 TV조선 펭귄팀이 연이어 쏟아냈던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모금’ 등 일련의 보도로 본 것이다.

2017년 3월 10일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2017년 3월 10일 당시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을 선고하고 있다. (사진=뉴스1)

TV조선 펭귄팀의 국정농단 사건 취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2014년 11월 2일부터 한달 가까이 박근혜 의상실 내부를 향하고 있던 CCTV영상이 바로 펭귄팀 취재의 출발점이었다. 

의상실 CCTV영상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취재의 출발점 

이 CCTV 의상실 영상이 방송전파를 타기 넉 달여전인 2016년 6월 10일. 펭귄팀 기자 5명을 회의실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프로젝터와 PC를 연결시켜 외장하드에 저장돼있던 동영상을 스크린에 띄웠다. 1년 6개월 동안 은밀하게 잠재워뒀던 동영상을 외부에 처음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박관천 경정이 권력 서열 1위라고 했던 최순실이다. 정윤회 게이트 때 나왔던 정윤회씨 부인이고,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 여기 최순실씨 옆에 서 있는 여성은 청와대 특혜 채용 논란이 일었던 윤전추다. 또 이 남성은 아직도 청와대에 근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영선 행정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옷들은 전부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나 국내 행사에 입고 나간 옷이다” 

펭귄팀 기자들이 숨죽이면서 영상을 응시하는 가운데, 화면속 인물에 대한 설명을 일사천리로 이어갔다. 

“이번 취재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다. 그리고 이 영상은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 정황일 뿐이고, 취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CCTV영상을 손에 넣은 뒤 1년 6개월동안 주섬 주섬 정보를 모으고 취재해왔던 내용을 바탕으로 펭귄팀 기자들에게 국정농단 사건 취재 방향을 3갈래로 제시했다. 최순실의 힘으로 장관들이 바뀌고, 김종과 차은택 등을 수족처럼 부리며 문화 체육계를 좌지우지한 인사농단, 문화 체육 지원 사업을 멋대로 설계해 예산이 집행되도록 한 예산농단, 그리고 기업 강제 모금을 통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등이었다.

통상 게이트형 대형 사건 취재는 단초를 바탕으로 퍼즐맞추기식으로 진행하면서 취재된 팩트를 놓고 그림을 그려나가지만, 이번엔 이미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방향과 밑그림을 먼저 제시하고, 기사로 쓸 수 있는 구체적인 팩트 취재를 해나가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론 처음부터 게이트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출발해 취재를 통해 팩트가 하나씩 모아지면서 사건의 성격이나 구도가 잡힌다. 하지만 이번 취재는 국정농단이라는 걸 아는 상황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국정농단을 입증하고 기사에 제시할 팩트 취재를 하는 식으로 전개되어야 했다. 통상 취재방식과 반대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후배들에겐 ‘역취재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먼저 확보된 건 박근혜 의상실 CCTV였지만, 보도 순서는 취재된 내용들이 하나씩 먼저 나오고 이후 비선실세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에서 CCTV영상 보도가 나중에 배치돼야 했다. 국정농단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선 최순실이 등장하기 전에 먼저 '최순실 국정농단’의 하수인이나 국정농단의 결과로 빚어진 사안들을 취재해 언론 보도로 하나씩 들춰내야 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이 모든 근원이 비선실세 최순실이었고, 최순실과 박 전 대통령과 관계는 이렇다’는 구도로 풀어가야 한다고 봤다. 그래야만 정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비선 최순실’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행위’를 덮지 못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손에 쥔 ‘결정적 무기’는 의상실CCTV영상이었다. 취재는 결정적 무기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무기를 쥐고 올라가야 할 ‘고지’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CCTV영상은 단지 수단이었고, 영상엔 드러나 있지 않는 함의와 전후 맥락을 취재해야만 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20p / 이진동, 개마고원)

2016년 10월 TV조선 사회부장 재직당시 박근혜 의상실 CCTV영상 보도와 관련 뉴스에 출연 중인 필자.(사진=TV조선 보도화면 캡처)
2016년 10월 TV조선 사회부장 재직당시 박근혜 의상실 CCTV영상 보도와 관련 뉴스에 출연 중인 필자.(사진=TV조선 보도화면 캡처)

그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건 취재의 출발점이이었던 박근혜 의상실CCTV는 어떻게 손에 들어왔을까. 당시 박근혜 의상실CCTV 보도 이후 일부에선 ‘몰래카메라’라는 주장을 펴는 등 말이 많았지만, 몰래카메라가 아닌 CCTV였을 뿐이다. 

이 CCTV영상은 고영태를 통해 손에 쥐게 됐다. 고영태를 처음 만난 건 2014년 10월이다. 고영태와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 한 명이 “펜싱 국가대표 선수출신인데, 상담할 게 있다”고 시간을 요청해 와 점심 무렵 서울 무교동의 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이날 고영태도 함께 왔다.

고영태 찾아와 "최순실이 1억 가져갔는데, 찾을 방법 없는지"물어 

그 날 고영태와 오갔던 대화다.
“어떤 여자가 제 여자 친구만 있는 집에 들어와 현금 1억 원과 명품시계를 가져갔는데,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요.”
“입구에 CCTV 이런 거 없어요? 경찰에 신고하면 될 텐데.”
“경찰에 신고해도 덮어버릴 거예요.”
“누군데 마음대로 그런걸 덮는다는 거죠?”
“최순실이라고 해요.”
“최태민 목사의 딸 그 최순실……?”
“네 맞아요.”

고영태의 얘기를 처음엔 ‘남녀간 문제’ 정도로 생각하며, 그렇게 심각하지 않게 들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갑자기 ‘최순실’이 툭 튀어나와, “정윤회씨 부인 최순실이라는 거죠?”라고 재차 확인했다. 최태민의 딸이자 정윤회의 부인 최순실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2007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박근혜 후보의 큰 취약점이 ‘최태민’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기자라면 정윤회와 최순실을 모를 리 없었다.

고영태의 요지는 경찰도 손을 못 쓸 테니, 어떻게든 최순실을 혼내서 돈을 받게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짧은 시간 얘기에 ‘김종 (당시 문체부 제2차관)’이나 차은택의 이름도 언급됐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던 인물도 아니어서 연관성이나 맥락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고영태 역시 조리있게 얘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고영태가 말하는 최순실이 내가 알고 있던 ‘최순실’과 동일인인지를 확인해봐야 했다. 10월 마지막 주말에 신사동의 한 음식점으로 고영태를 다시 불렀다. 두 번째 만남인지라, 고영태는 첫 만남보다 훨씬 편하게 얘기했고 나이차도 있고 해서 나 또한 편하게 말을 놓았다. 

“최순실과는 어떻게 알았어?”
“2012년 대통령 선거 무렵 가방을 만들어주면서 알게 됐어요.” 고영태는 2008년경부터 가방 제조회사를 운영하다가 2014년에 폐업했다.
“최순실은 지금은 뭘 하지?”
“대통령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고영태는 원래 대통령 옷을 만드는 신사동 의상실과 직원들을 자신이 관리해왔는데, 최순실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최순실이 업무에 썼던 돈조차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 동안엔 의상실의 실장이나 디자이너 등 직원들 월급을 자신이 직접 줘서 관리가 잘 됐는데, 지금은 직원들이 말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기 사무실 계약자는 누구고, 관리비는 누구 이름으로 냈나?”
“제가 다 했죠.”
“직원들 월급까지 줬단 말이지?”
“네.”
“그럼 임대계약서와 임대료나 관리비 낸 영수증, 통신비 전기료 등 각종 공과금 낸 증빙서류들이 다 있겠네?”라고 묻자 고영태는 “찾아보면 다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다 챙겨뒀다 다음에 만날 때 가져와보라고.”

고영태 얘기는 그럴 듯했지만, 말만으로는 진짜 최태민의 딸 최순실인지 동명이인인지 결론내릴 수 없었다. 우선 얼굴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최순실이 집에 찾아와 1억 원을 가져갈 당시 건물 출입구 CCTV에 찍힌 영상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라고 했다. 어차피 1억원 건으로 경찰에 신고하려면, 그 영상부터 확보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고영태는 “숙소 주차장쪽 입구에 CCTV가 있긴 한데, 찾으면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떤 여자가 고영태 집을 찾아올 당시 건물 출입구에 잡힌 CCTV영상을 보내왔다. ‘그 여자가 최순실’이라고는 하는데, 얼굴 형체를 자세히 알아보긴 어려웠다. 캡처를 해도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2016년 12월 7일 최순실 등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장에 출석한  고영태(오른쪽)씨가 정회되자 퇴장하고 있다. 왼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하수인 역할을 차은택씨.(사진=뉴스1)
2016년 12월 7일 최순실 등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장에 출석한  고영태(오른쪽)씨가 정회되자 퇴장하고 있다. 왼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하수인 역할을 했던 차은택씨.​
​​​​​​(사진=뉴스1)

고영태 제보한 '최순실'이 그 '최순실'인지 얼굴 확인하려 CCTV설치 제안

“옷 만드는 사무실엔 CCTV 없어?” 
“거긴 없어요.” 
“나중에 혹 방송 보도를 하게 되면 영상이 필요한데, 알아서 가져와봐. 고 대표 사무실이라고 했으니 어렵지 않잖아?” 
고영태가 사무실을 임대했고, 임대료 관리비 전기료 등을 내는 사무실 관리자가 고영태였기 때문에 CCTV설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고영태에게 주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고영태는 그 사무실에 CCTV를 설치했다고 알려왔다. 

혹시 몰라 방송보도를 하게 될 상황에 대비해 알고 지내던 변호사에게 법적 자문을 미리 구했다. “사무실 관리자라면 CCTV설치도 문제 없고, 취재 입증 자료 수집 차원이니 방송에 그걸 써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언론의 국정농단 사건 보도 이후 검찰이 뒤늦게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 착수하면서 검찰 역시 고영태에게 ‘사무실 임대료 계약서’와 ‘의상실 관리비 영수증’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CCTV설치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CCTV를 설치했다고 들은 지, 한달 쯤 됐을 무렵 돌발변수가 생겼다. 
2014년 11월 28일 ‘정윤회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정윤회는 최태민 목사의 사위이자 최순실의 남편이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 있던 박관천 경정이 ‘비선실세 정윤회 관련 동향’ 보고를 한 게 정윤회 게이트의 시발점이었다. 이 보고서 내용 중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 관련 내용이 포함되면서 2014년 박관천이 청와대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얼마 뒤 세계일보가 정윤회 동향 보고 문건의 내용을 보도하면서 ‘정윤회 게이트’란 이름이 붙었다. 박관천의 동향 보고엔 정윤회가 이른바 안봉근 이재만 정호성 문고리 3인방 등 실세 청와대 행정관 10명과 강남 등지에서 모임을 하며 국정과 인사에 개입했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당시 ‘청와대 문건 유출’과 ‘문건에 담긴 의혹 사항’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전방위 압수수색에 나섰다. 고영태가 CCTV를 설치했다는 사무실이 어떤 곳인지는 몰랐지만, 만약 고영태 말대로 최순실이 드나드는 사무실이 맞다면 그 곳으로 불똥이 튀지 말란 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이 되면 CCTV영상은 구경도 못하고, 고영태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때까지는 CCTV에 어떤 장면이 들어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고영태가 최순실이라고 해서 ‘최순실’로 알았던 것이지, 진짜 ‘최순실’인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정윤회 게이트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고영태에게 “CCTV는 잘 돌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CCTV인데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몰라?”
 “네. 그냥 선반에 올려뒀는데 직원들이 보고 나서도 아무도 신경 안써요. CCTV인줄 잘 모르나봐요.”  

고영태는 “별 문제가 없다”며 느긋해했지만, 안심할 수 없어 일단 그 때까지 확보된 영상과 고영태가 갖고 있는 관련 자료를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최순실과 관련된 자료가 맞다면 최대한 확보해두자는 차원이었다. 

2014년 12월 고영태가 메신저로 보내온 최서원(최순실)씨 사진. 
2014년 12월 고영태가 메신저로 보내온 최서원(최순실)씨 사진. 

12월 중순쯤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 급한 마음에 혹시 최순실 사진이 있으면 그것부터 보자고 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나기 이틀 앞서 마침내 ‘최순실의 얼굴’이 메신저로 도착했다.

흰색 나이키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사진이었다. 게다가 약간 측면이고, 그늘진 곳이라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더 보내달라고 해 받은 사진 역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고영태는 최순실이 사진찍히는 걸 무척 싫어해서 그나마도 겨우 구한 것이라고 했다. 최순실은 그때까지만 해도 카메라에 잡힌 적이 거의 없었다. 2013년 7월 22일 한겨레신문이 정윤회 인터뷰를 하면서 정윤회‧최순실이 경마장 관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장면의 사진 정도였다. 이 때 사진과 고영태가 보내온 최순실 사진을 보니, 닮았고 패션까지 비슷했다. 흰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영락없었다. 두 장의 사진 속 선글라스의 하얀색 테도 같아 보였고, 왼손에 찬 시계의 하얀 줄 역시 비슷했다. 같은 제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진을 통해 고영태가 말한 ‘최순실’과 내가 알고 있던 ‘최순실’이 동일인임이 입증된 셈이었다. 그러자 고영태가 가져오게 될 CCTV영상과 자료들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2013년 7월 22일자 한겨레신문 2면 보도 사진. (출처=한겨레사진 캡처) 
2013년 7월 22일자 한겨레신문 2면 보도 사진. (출처=한겨레사진 캡처) 

그로부터 이틀 쯤 뒤 “저녁 8시 차움빌딩 3층 거기서 보자고”라는 문자를 보내 고영태를 불러냈다. 사진으로 ‘최순실’을 확인한 이상, 고영태가 “최순실이 김종 차관으로부터 비선 보고를 받는 곳”이라고 했던 차움빌딩 3층 R레스토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영태는 약속 장소를 차움빌딩 옆 커피숍으로 바꿔 답이 왔다. ‘혹시라도 최순실을 마주칠까봐 껄끄러워 차움빌딩을 피하나보다’고만 짐작했을 뿐이다.

당일 고영태에게서 CCTV영상이 담긴 외장하드를 넘겨받은 뒤 밖으로 나와 김종 차관이 ‘비선 실세’인 최순실을 만나러 올 때, 어디서 내려 어느 출입문을 이용하고, 최순실은 어느 쪽으로 들어가는지 안내해달라고 했다. 카메라로 포착하기 위해선 동선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차움빌딩 뒤편으로 돌아가자 주택가 골목 방향으로 후문 출입문이 있었는데, 김종은 눈에 띠지 않도록 후문을 이용한다고 했다. 김종이 ‘비선 보고’ 장소로 이용한다는 3층 레스토랑도 직접 들어가 훑어보고 나왔고, 최순실의 차가 들고나는 주차장 입구도 확인했다. 현장에서 고영태에 몇 가지 사항을 추가로 확인했다.

“김 차관은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날 때 최순실을 뭘로 호칭하지? 회장님? 소장님?”
“회장님 회장님 하고 불러요. 김종도 최순실이 VIP(박근혜 대통령)와 직접 연결된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소장(최순실)은 그런 관계를 김종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최는 김종을 뭐라 불러”
“김 차관이라고 합니다”
최순실은 김종에게 대통령과의 관계를 에둘러 얘기했지만, 김종은 눈치를 채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직 차관이나 되는 사람이 최순실에게 ‘회장님’이라는 극존칭을 쓴건 당연히 대통령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랑 관련된 사람은 ‘소장님’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회장님’ 호칭을 씁니다”
“옷 만드는 사무실 거긴 뭐라 부르는데?”
“샘플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박근혜 대통령의 의상실 CCTV는 내 손안에 굴러들어왔다. 내 제안에 따라 CCTV를 설치해서였는지, 고영태는 복사본을 만들지 않고 원본을 그대로 넘겨줬다. 

2014년 11월 2일부터 같은해 12월 4일까지 한달 치의 영상이었다. 파일을 열자 최순실이 이른바 ‘샘플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시 입었던 옷을 걸어놓고 작업자들에게 지시하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헬스트레이너를 하다 행정관으로 발탁돼 논란이 됐던 윤전추 행정관의 얼굴은 쉽게 알아봤다.

며칠 뒤 쉬는 날을 골라 직접 CCTV가 설치됐던 ‘샘플실’을 찾아가봤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멀지 않았다. 3층 사무실이었는데, 겉에서 보기엔 작은 사무실이었고, 출입문엔 상호도 붙어 있었다. 의상실이 들어오기 전 회사의 상호였는데, 일부러 떼지 않고 둔 듯 했다. 

이 CCTV는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 물증이었지만, 최순실의 국정농단 취재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CCTV영상은 취재의 완성이 아니라, 취재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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