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17

후기 낭만 교향악의 절정 '브루크너 & 말러' (2)

사람들은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은 모든 예술 가운데 천부적인 재능이 가장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신동이 가장 많이 나오는 분야 역시 음악이기도 하다. 음악 신동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정확한 음정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인 절대음감, 미묘한 음악적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청음력, 복잡한 악보를 빠르게 암기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억력, 악기를 연주하는 데 필요한 손가락과 팔의 섬세한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는 신체능력, 음악의 구조와 작곡 기법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하지만 신동들 역시 어두운 면도 있다. 어려서부터 받아야 하는 교육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고, 또래와 어울릴 시간이 부족해 사회성 발달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초기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빛바랜 존재가 될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 

천재부터 늦깎이까지 클래식 작곡가들의 초상 모자이크.
천재부터 늦깎이까지 클래식 작곡가들의 초상 모자이크.


그러나 음악계 역시 어려서 혹은 젊어서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인정을 받은 대기만성형 음악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오랜 시간 연습을 통해 축적한 뛰어난 기술을 갖추고 있고,  음악의 구조와 작곡 기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소유했다. 삶을 통해 얻은 철학과 가치관을 작곡과 연주에 녹여내며 음악을 통해 소통할 줄 안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이 천재 계열의 대표라면 브루크너는 대기만성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유럽 부르주아 가문에서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하나의 교양처럼 인식됐다. 이후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사회가 점점 세분화 전문화하면서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전문가와 청중으로 양극화하며 아마추어로 연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게 됐다.

하지만 숨겨진 음악 재능을 찾아내 20세 이후에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해 족적을 남긴 작곡가들 역시 출현한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c Satie·1866~1925)는 20세가 되어서야 음악 공부를 시작해 독학으로 작곡을 했는데, 드뷔시를 이어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이나 미국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 (Charles Ives·1874~1954) 경우도 10대부터 음악원에 들어가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의 첫 작품 발표는 30세를 전후해 이루어졌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나이 5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일 도나우어징엔 현대음악제를 통해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40살까지 작품 발표 없이 공부만 한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1824~1896)가 살았던 시기를 보면 브람스(1833~1897)와 거의 겹친다. 하지만 그가 후기낭만파로 분류되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활동 기간 때문이다.   

10대 말 3년간 몰락해버린 집안의 생활을 위해 빈트하크(Windhaag) 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던 브루크너는 상사인 인격파탄자 프란츠 푹스(Franz Fuchs) 선생으로부터 끝없이 비하를 당하면서도 견뎌냈다. 하지만 자신의 공부와 음악이 아닌 다른 일반과목을 가르쳐야 했던 브루크너는 이때부터 평생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이로 인해 음악가로서의 데뷔도 많이 늦었다.

브루크너의 실질적 스승 제네티의 사진.
브루크너의 실질적 스승 제네티의 사진.

1843년 다행스럽게 너무 늦지 않게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된 미하엘 아르네트 신부(Prelate Michael Arneth)는 브루크너를 빈트하크를 떠나 성 플로리안(Sankt Florian) 수도원 근처 마을인 크론스트오르프 안 데어 엔스(Kronstorf an der Enns)학교의 보조 교사로 전출시켰다. 여기에서 2년 동안 봉직한 브루크너는 덜 불행한 시간을 보냈다.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레오폴트 폰 제네티(Leopold von Zenetti)에게서 3년간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티 덕분에 이전 크론스트오르프 시절의 작품들에 비해 예술성이 상당히 향상됐다. 그리고 마침내 ‘브루크너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음악이 시작됐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게 됐다. 크론스트오르프 시절 작품 중 성악곡 ‘Asperges me’(WAB 4) 악보 말미에 갓 스물을 넘긴 젊은 브루크너는 "Anton Bruckner m.p.ria. Comp[onist]"라는 서명을 남겼다. 이는 연구자들 사이에 브루크너가 예술을 향한 꿈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초기의 신호로 해석됐다. 

아르네트 신부의 관심과 배려 덕에 1845년 5월 정식 보조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브루크너는 크론스트오르프에서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으로 돌아와 10년 동안 교사와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장크트 플로리안의 학교 중 하나의 조교로 옮긴 브루크너는 교사 등급과 관련된 시험에 합격하여 고등 교육 기관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는 모든 분야의 우등 등급을 획득함으로써 성실함을 증명했다. 1848년 24살의 브루크너는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지명되었고, 1851년에는 정식으로 취임했다. 장크트 플로리안 성당에서 주로 연주하던 레퍼토리는 미하엘 하이든(Michael Haydn),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및 아우만(Franz Joseph Aumann)의 음악이었다. 

31살의 어엿한 청년이 된 브루크너는 1855년 빈의 유명한 음악 이론가인 제히터(Simon Sechter)에게 배우고 싶어 1년 전에 작곡한 <장엄 미사>(WAB 29)를 개인 오디션에 제출했다. 근무하는 곳의 위치상 대면 레슨은 자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음악 이론과 대위법 등을 포함한 제히터의 교육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배움에 목말랐던 브루크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브루크너가 직접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1854년에 출판된 제히터의 책을 바탕으로 커리큘럼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젊은 브루크너의 사진.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던 젊은 브루크너의 사진.

일반학교의 교사 겸 성당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작곡가로서는 거의 독학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루크너는 1861년 3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작곡공부를 시작했다. 브루크너보다 9살 어린 린츠 시립극장(Linz Stadttheater)의 지휘자 오토 키츨러(Otto Kitzler)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음악을 소개했고, 브루크너는 1863년부터 본격적으로 광범위한 공부에 깊이 빠져들었다. 브루크너는 1862~1863년에 작곡한 F단조 "연구" 교향곡, 3개의 관현악곡, D단조 행진곡, G단조 서곡 등 최초의 관현악 작품을 키츨러의 가르침 아래 수행되는 단순한 연습작품으로 간주했다. 브루크너는 40세까지 키츨러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나이 들어서까지 진지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공부한 브루크너가 인정받기 시작할 날도 느리지만 가까워오고 있었다. 

차근차근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쌓아올라간 말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면서도 학생 오케스트라에는 타악기 주자로 들어갔다. 복잡한 악보를 읽는데 익숙했던 그는 리허설 내내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며 전체적인 관현악 사운드와 리듬을 익혔다. 말러의 음악원 동료 학생 중에는 미래의 독일 가곡의 맥을 잇는 작곡가인 후고 볼프(Hugo Wolf)가 있었는데, 말러는 볼프와 친밀한 우정을 쌓았다. 반항아 볼프는 음악원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지 못해 퇴학당했다. 말러 역시 때때로 반항적이었지만 원장인 헬메스베르거(Hellmesberger)에게 반성문을 제출해 같은 신세를 피했다.

당시 빈 음악원에 말러보다 34살 연상인 브루크너가 출강하고 있었는데, 말러는 가끔 안톤 브루크너의 강의에 참석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브루크너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말러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877년 12월 16일, 말러는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의 초연에 참석했다. 브루크너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청중들은 작곡가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말러와 다른 동정적인 학생들은 나중에 교향곡의 피아노 버전을 준비하여 브루크너 앞에서 연주하며 교수를 위로했다. 

말러 역시 그의 세대의 많은 음악학도들과 마찬가지로 바그너의 매력에 빠졌지만 그가 학생 시절 바그너의 오페라를 본 적이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오히려 말러의 주요 관심은 오페라 같은 무대작품보다는 음악의 소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러는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했으나 다소 반항적인 학창시절 때문인지 우수 졸업생에게 수여되는 메달은 받지 못했다. 

말러는 바로 음악과 관련한 직업을 얻는 대신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대학에 가기로 했다. 대학입학의 전제 조건이었던 김나지움의 매우 까다로운 최종 시험인 마투라(Matura)에 어렵게 합격한 말러는 빈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관심분야였던 문학과 철학 분야를 공부했고, 2년만에 학사 학위를 따고 졸업했다. 

말러는 대학시절 친구 지그프리트 리피너(Siegfried Lipiner)로부터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니체(Friedrich Nietzsche), 페히너(Gustav Fechner) 및 로체(Hermann Lotze)의 저작들을 소개받았다. 이 사상가들은 학생 시절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말러와 그의 음악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말러의 전기 작가인 조나단 카(Jonathan Carr)는 작곡가의 머리가 "보헤미안 밴드, 트럼펫 경적과 행진곡, 브루크너 합창단과 슈베르트 소나타의 소리로 가득 차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파헤쳐 온 철학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고동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말러의 21살 때 젊은 시절 사진.
말러의 21살 때 젊은 시절 사진.

1879년 빈 대학을 졸업한 말러는 피아노 교사로 일하면서 약간의 돈을 벌었고 이제 자신의 주된 관심분야로 떠오르기 시작한 작곡을 계속했다. 1880년에 말러는 극적인 칸타타 <애도의 노래>(Das klagende Lied)를 완성했는데, 그의 첫 번째 실질적인 작품인 이 곡은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영향의 흔적을 보여주면서도 음악학자 데릭 쿡이 "순수한 말러"라고 묘사한 많은 음악적 요소가 들어있는 곡이었다. 그러나 말러는 이 곡의 초연을 서두르지 않았고, 1901년에 이르러서야 수정되고 단축된 형식으로 발표했다. 

1880년 6월~8월의 여름 휴가 시즌에 말러는 린츠(Linz) 남쪽 온천 마을인 바트 할(Bad Hall)에 있는 작은 목조건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레퍼토리는 가벼운 오페레타들뿐이었다. 말러의 전기작가 카(Carr)는 "암울한 작은 일"이었다고 묘사했지만, 말러의 빈 음악원 피아노 스승 엡슈타인(Julius Epstein)은 "제자가 곧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며 격려했다. 이것이 말러의 첫 관현악 지휘가 됐다.

1881년에 말러는 라이바흐(Laibach, 지금의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 있는 극장(Landestheater)에서 6개월 짜리 단기 계약의 지휘자 자리를 받아들였다. 작지만 수완이 풍부한 극장의 흥행주는 반년동안 10개의 오페라와 수많은 오페레타를 올렸다. 말러는 여기서 베르디의 첫 번째 본격적인 오페라인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를 지휘했다. 이 계약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은 말러는 음악의 도시 빈으로 돌아와 카를극장(Carltheater)에서 파트타임 합창 지휘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지휘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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