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 17

후기 낭만 교향악의 절정 '브루크너 & 말러' (1)

바로크 시대까지 유럽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지만, 고전 시대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빈을 포함한 독일어권으로 음악의 중심을 옮겨갔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독일지역의 신성로마 제후국들이 저마다 오케스트라와 극장을 보유하면서 수요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전기 낭만파 시대에도 독일은 여전히 음악의 중심지역으로 슈베르트, 베버, 슈만, 리스트, 멘델스존이 낭만음의 깊이를 더해갔으며, 브람스가 그 맥을 이었다. 이 큰 흐름은 19세기 후반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후기 낭만파 음악으로 이어졌다. 

독일 후기 낭만파 음악의 특징으로는 가장 먼저 대규모의 관현악곡을 들 수 있다. 독일이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통일되면서 독일제국이 성립되고 생산력이 높아졌다. 대규모 음악을 감당할 만한 조건이 되자 대규모의 관현악곡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통일 독일은 이전 여러 제후국들에 속했던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정신적 담론이 필요했고, 그것을 독일 신화와 음악에서 찾았다. 

대규모 관현악곡의 상징 말러의 '1000인교향곡'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LA필하모닉 연주장면.
대규모 관현악곡의 상징 말러의 '1000인교향곡'을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LA필하모닉 연주장면.


바그너는 그들에게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국 가극장의 확대와 관현악단의 규모 증대는 외형적 가능성을 넓혀주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등 대규모의 관현악곡들은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국가와 경제 발전에 부풀었던 청중들의 마음을 더 부풀렸다. 

엄격한 고전적 형식에서 벗어나 풍부한 음향과 색채를 추구했던 경향에 따라 각 악기의 음색을 살린 다양한 악기 편성이 시도됐따. 반음계 진행과 불협화음을 많이 사용하는 등 작곡가들은 새로운 작곡 기법을 도입했다. 이전에 실험되던 악기들이 도태될 것은 도태되고, 정착할 것은 정착하면서 관현악 사운드의 전형이 잡혔다. 여기에 특별한 음색을 원하는 작곡가는 민속음악의 악기나 별도의 타악기를 넣어 자신만의 색채를 시도했다. 

후기 낭만파 음악은 형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곡가들에 의해 이전 시대의 음악보다 더욱 다채롭고 표현력이 풍부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후기 낭만파 음악에서 사용된 새로운 작곡 기법과 표현 방식은 20세기 음악의 다양한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음악재능도 공부습관도 뛰어났던 소년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1824~1896)는 오스트리아 린츠(Linz) 교외에 가까운 시골 마을인 안스펠덴(Ansfelden)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농부와 장인 가문이었는데, 안톤의 할아버지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던 1776년에 안스펠덴의 마을학교 교장이 되었고, 1823년 아버지인 안톤 브루크너 시니어에게 물려주었다. 시골 환경에서는 급여는 적었지만 존경받는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테레제 헬름(Therese Helm)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안톤은 그중 장남이었다.

음악은 학교 커리큘럼의 일부였으며, 자연스럽게 아버지는 어린 안톤에게 첫 번째 음악 교사가 되었다. 특히 어린 안톤은 일찍부터 오르간 연주법을 배웠고, 이 악기에 어려서부터 몰입해 종종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할 당시에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엄청난 연습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안톤은 여섯 살 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습에 대한 타고난 열정으로 일찍 상급반으로 월반했다. 일취월장 했던 소년 안톤은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업을 도왔고, 학생들이나 마을사람 누구도 이를 당연히 여겼다.  

아버지 학교에 들어간 지 3년만인 1833년 브루크너의 아버지 안톤 시니어는 장남 안톤 주니어를 회르싱(Hörsching)에 있는 다른 학교로 보냈다. 교장인 요한 밥티스트 바이스(Johann Baptist Weiß)가 음악 애호가이자 존경받는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십대에 들어선 소년 안톤은 여기서 정규 수업시간을 마치고 나면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기술을 연마했다. 1835년경 안톤이 11살 때 첫 번째 작품인 오르간곡 ‘Pange lingua’를 썼는데, 그는 생애 말기에 수정해 발표했다. 

아버지의 질병 소식을 들은 소년 안톤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3살 짜리 장남에게 많은 동생들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학교 관사와 교장 직위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브루크너 가족은 살던 집에서 나와야 했다. 

어지러운 집안 일이 정리되고 나자 소년 안톤은 숙식과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Augustinian monastery) 소년 합창단원으로 가야 했다. 배우는 데 열심이었던 소년 안톤은 오르간을 더욱 깊이있게 공부했고 바이올린도 배웠다. 수도원 본당에는 1세기 전인 바로크 시대 제작된 거대한 오르간이 있었다. 1837년에 재건축된 이  거대한 오르간에 경외감을 느낀 안톤은 합창단장에게 부탁해 교회 예배 중에 가끔 이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중에 이 오르간은 "브루크너 오르간"으로 불리게 된다.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안톤이 변성기가 와서 합창단을 나오게 되자 안톤의 어머니는 1841년 아들을 린츠에서 열리는 음악이 아닌 일반교육 사범학교 단기과정에 보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 예배당에 위치한 아름다운 '브루크너 오르간'.
성 플로리안 수도원 예배당에 위치한 아름다운 '브루크너 오르간'.

뭐든지 성실하고 열심이었던 안톤은 우수한 성적으로 사범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후 빈트하크(Windhaag)에 있는 학교에 보조 교사로 임용되었다. 생활 수준과 급여는 처참한 지경이었고, 게다가 상사인 프란츠 푹스(Franz Fuchs) 선생으로부터 끊임없는 갑질을 당했다. 굴욕감을 겨뎌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안톤은 결코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이때 푹스가 그의 내면에 심어놓은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믿음은 평생 동안 안톤의 주요 개인적 특성 중 하나로 남아 있게 된다. 안톤은 17세부터 19세까지 빈트하크 학교에서 음악과 관련이 없는 일반과목을 가르쳤다.

거리의 다양한 음악을 흡수한 소년 말러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동부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 그룹에 섞여 살던 유대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소수 집단 안에서도 마이너 그룹에 속했던 말러 가문은 매우 가난해 말러의 할머니는 거리 행상인으로 생계를 꾸렸고,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Bernhard Mahler)는 마부였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 속에서  미래의 작곡가는 일찍부터 "항상 침입자이고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망명 의식이 영구적으로 각인됐다.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열심히 그리고 착실히 돈을 모아 여관을 인수했고, 해당 지역에서는 나름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칼리슈테(Kaliště) 마을에 소박한 집을 샀고, 1857년에 지역 비누 제조업체의 딸인 19세의 마리 헤르만(Marie Herrmann)과 결혼했다. 이듬해 마리는 14명의 자녀 중 첫째인 이시도르(Isidor)를 낳았으나 유아기에 사망했고. 2년 후인 1860년 7월 7일에 둘째 아들 구스타프가 태어났다.

독학 피아노 천재 소년 시절 말러의 사진.
독학 피아노 천재 소년 시절 말러의 사진.

그해 말 베른하르트는 이흘라바(Jihlava 독일어로 Iglau)로 이사해 주류 증류소와 선술집 여관을 세웠다. 베른하르트와 마리는 계속 아이를 낳았는데, 당시 열악했던 위생 환경에 따라 그들의 자녀 중 6명만이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았다. 이흘라바는 당시 2만명 의 인구가 거주하는 나름 번성하는 상업 도시였고, 말러 가의 선술집 여관은 광장과 가까운 대로변에 있었다. 구스타프는 당시의 거리 노래, 댄스 곡, 민요, 지역 군악대의 트럼펫 연주와 행진곡을 통해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나중에 그의 성숙한 음악적 표현에 녹아들어갔다. 

어린 구스타프가 음악 교육과 만난 것은 4살 때 조부모의 피아노를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간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관에 들른 손님들이 대충 이것 저것 말해주었지만, 어린 구스타프는 조악한 조언들을 소화해 연주력을 발전시켰다. 지역의 음악 신동으로 인정되던 그의 첫 공개연주회는 10세 때 마을 극장에서였다.

소년 구스타프는 음악 만드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가 다녔던 학교 이흘라바 김나지움의 생활기록부에는 그를 정신적으로 산만하고 학업은 신뢰할 수 없다고 적혔다. 그러나 이는 대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버린 천재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기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베른하르트는 1871년에 소년의 학업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라하의 신도시학교(New Town Gymnasium)로 보냈으나, 적응하지 못한 구스타프는 불만을 품고 얼마 안 가 이흘라바로 돌아왔다.

1875년 4월 13일, 2살 아래 에른스트(Ernst)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자 15살 소년 구스타프는 쓰라린 상실감을 겪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며 작곡가로서의 삶에 접어드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었다. 친구 요제프 슈타이너(Josef Steiner)의 도움으로 그는 잃어버린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오페라 <슈바벤의 공작 에르네스트>(Herzog Ernst von Schwaben) 작곡을 시작했다. 악보와 대본 모두 남아 있지 않아 작품의 완성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아들이 선술집 주인을 이어받기보다는 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기를 원해 음악 경력에 대한 아들의 야망을 지지했고, 아들이 빈 음악원(Vienna Conservatory)에 진학하려는 것에 동의했다. 젊은 말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의 오디션을 받았고 1875년 가을 학기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수인 엡슈타인에게 배우면서 피아노 연주력에서 눈에 띄는 진전을 이루었고 2년마다 경연에서 수상해 그의 발전을 증명했다. 그는 피아노 전공이었지만, 음악원의 마지막 해인 1877~1878년에 푹스(Robert Fuchs)와 크렌(Franz Krenn) 교수 밑에서 작곡과 화성법 공부에도 집중했다.

말러가 다녔던 빈 음악원의 현재 모습.
말러가 다녔던 빈 음악원의 현재 모습.

그러나 말러가 빈 음악원 학생시절에 작곡한 것들 중 중 살아남은 작품은 없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빈 음악원장은 독재적인 성격의 헬메스베르거(Joseph Hellmesberger)였는데, 사보 오류를 이유로 경멸스러운 태도로 말러의 작품을 짓밟자 화가 난 말러는 졸업작품 경연을 위해 준비한 교향곡 악장을 폐기해버렸다. 

구스타프 말러는 학창시절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후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이라고 생각했던 바그너 오페라의 선도적인 해석자가 되었다.

나중에 교향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말러는 음악원의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리허설과 연주를 통해 첫 지휘 경험을 얻었다. 음악원에서 피아노가 주전공이었던터라 오케스트라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타악기 연주자였으나 오히려 자주 나오지 않는 악기라서 그는 리허설 내내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며 지휘의 기초적인 감각을 익혔다. 그렇게 그는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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