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심정택의 미술작가 평론 미술딜라이트]

전시 '따뜻한 중력의 떨림', 제이94 갤러리서 3월20~4월7일

남여주(61) 작가는 20여년을 강의해오던 대학의 교과목 통폐합을 계기로 작업에 전념하였다. 이후 미술 시장의 부침에 상관없이 꾸준하게 작품이 팔리는 인기 작가군에 올라섰다.

Reflective 24032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Reflective 24032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작가는 시장의 요구대로만 작업하지 않는다. 매년 할 만큼의 작품만을 하면서도 동일한 구도나 색채는 배제하여 왔다. 남여주 작품이 가진 정체성은 ‘물 선’이다. 이 '물 선'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는 잔물결, '윤슬'이기도 하고, 봄날 도심 하천 위에서 내려다본 수면의 물살이기도 하다. '물 선'은 작품을 눕혀 드리핑 방법으로 작업하였다.

2022년 <상생의 유토피아>, 2023년 <그리고 빛> 전시의 특징은 ‘담는다’ 혹은 ‘담았다’였다. 각종 그릇(花器)에 자연이 담겨있는 표현이었다. 작가는 작품 전체적으로는 ‘흐르는 물’의 개념을 유지하되 매개인 그릇에 더 집중하였다. 

풍경을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색의 화려함은 물을 매개로 한 형태 해체와 동반한다. 이전 원색의 강렬함은 탈색되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러한 점증적 변화가 지난 해 하반기부터 변곡점을 맞는다. 

화면 속 많아진 그릇이 중심 대상이 되면서 정지된 정물화처럼 보여져 ‘물 선’이 매개가 되어 거침 없고 경계가 없어야 하는 ‘흐른다’는 느낌이 희석되었다.

Reflective 17050-2 145.5 x 227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17
Reflective 17050-2 145.5 x 227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17


최근 작업은 수면 아래 위를 구분하지 않고 새벽녁의 물안개 핀 분위기가 흐른다. 몽환적 풍경의 매개로서 언덕 후미진 곳의 은초롱 꽃, 시멘트 포장길 틈새 접시꽃 등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피우는 존재들을 확장하여 왔다. 화초에 포함하지 않았던 맨드라미도 작가의 손길을 받아 화려하게 화면을 장악한다.

이번 전시 <따뜻한 중력의 떨림>에서 물고기가 수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 듯한 구도 작품이 보인다. 수면 밖 햇빛도 어른거린다. 그림 속 화자가 인어공주라면 얕은 바닥에 누워 그 햇빛도 즐기는듯 하다. 남여주 작품의 특징인 ‘동양적’ 미감에 ‘와유’가 더해졌다.

Reflective 24033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Reflective 24033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중국 남북조시대 화가인 종병(宗炳· 375~443)은 전국 명산을 다니며 그림 그렸으나 병을 얻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과거 자신이 노닐던 산의 경치를 그려 방 안에 누워서 보고 노닐었다. 이러한 종병의 산수화 감상법을 ‘와유(臥遊)’라고 하며, ‘와유와 창신(暢神·정신을 펼친다)’은 산수화 이론으로 자리잡는다.<산수화의 미학, 조송식 지음>

어린 시절, 작가는 투명한 자개장에 자신이 비쳐졌을 때 깨끗한 물이 고요히 정지해 있는 상태(明鏡之水)로 느꼈으며, 얼어버린듯 고체화한 물은 벽의 거울(mirror)을 보는 듯했다. 거울, 즉 '경(鏡)'은 자신의 생김새 뿐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모습까지도 읽어내는 게 아닌가.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남여주는 교교히 흐르는 달빛에 잠긴 듯한 깊은 산속 옹달샘 수면 아래 달항아리와 도자기, 바리때를 막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듯이 풍부한 입체적 공간감을 상상하면서 회화적 터치로 펼쳐냈다. 도자기는 유려한 자태가 선으로 중첩된 여성이기도 하다.

작가는 재료를 유화에서 아크릴로 바꾼 것 외에 약 40년간 '물'이라는 물성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여 왔다. 2000년대 초까지도 면, 원 등 패턴화하며 반복된 추상작업을 하였다. 2007년경부터 도자기와 바리때가 대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패턴(서클)은 '물 선'으로 상징화했다. 

작가는 평면의 캔버스에 공간(물)의 깊이에서 생기는 굴절을 평면화시켜 평면을 탈출한다. 막상 작품의 오브제로 어울릴 듯 한 수련이나 옥잠화 같은 수생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도자기 곁으로는 형체가 있는 듯 없는 듯 실체가 애매한 온갖 식물군들이 놓인다. 대상의 이미지를 정해서 그리는 것에 매력을 느끼질 못하였다. 

이미지를 중첩 또는 분산시켜 흘러가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화면의 공간에 ‘물 길’, ‘바람 길’을 내 흘러가면서 완성되어 간다는 느낌을 중요하게 보았다.

Reflective 24051 80.3 x 116.8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Reflective 24051 80.3 x 116.8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세상의 보이지 않는 모든 길은 리듬을 갖는다. 산사(山寺)의 요사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 소리, 아침이면 부엉이 울음 소리가 언덕 같은 산 너머 들판을 휘돌아 오는 것과 같은 동양적 정서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Lefebvre·1901~1991)가 말한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으로서 '리듬 분석'(rhythm analysis)과도 통한다. 

"반복은 차이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리듬분석'의 전제 중 하나다. 르페브르는 반복은 동일한 것의 무한복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반복 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틈입하는데, 그것을 차이라고 보았다.

남여주 화폭 속 리듬을 읽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의 표면(현재)을 넘어 존재의 심연인, 현전(現前·현재 있음, presence)으로 시선이 가는 것이다.

작업의 마지막 단계는 스와로브스키, 레진(resin), 비즈(beads)를 사용한다. 비즈는 빛의 거리와 위치에 따라 그림이 달라 보이게 한다. 빛이 투영된 수심의 굴절을 표현한다. 표면상의 질감은 마치 자개를 세팅시키거나 피아노 제작용 도장처럼 소리 공명을 반영한듯 하다.

‘이미지는 동양회화에서는 형상(形象)이다. 동양회화에서 화(畫)란 겉으로 나타나는(外現) 형태를 조성하는 형(形)과 내재적 의미로서의 상(象)이 종합되어 드러나는 시각예술 형식이다. <동양회화에 있어서 형상관점의 심미-정진용>

Reflective 24031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Reflective 24031 73 x 73 Acrylic, Resin, Bead on Canvas 2024


남여주의 ‘물’은 이러한 형상, '정해진 형'(常形)이 없고, 그것을 담는 그릇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왔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제 8장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면서, "물은 도(道)에 가깝다(故幾於道)"고 했다. 물의 고유한 성질은 '흐름'과 '순환'에서 찾을 수 있다. '순환'은 비·구름·수증기와 같은 공간적 모습의 변화상이지만 '흐름'은 지나가고 바뀌는 시간의 변화이다.

남여주 작가는 물 안개와 같은 습한 기운을 매개로 날이 저물며 비를 예고하는 바람, 부유하며 이미 부패가 시작된 꽃 이파리, 언덕에 올라서면 닿을 듯 밤하늘의 흘러가는 구름과 노니는 판타지를 그린다. 이러한 자연의 흐름 중심에 인간 또는 인성(人性)을 가진 존재가 있는듯 하다.

전시 <따뜻한 중력의 떨림>은 3월 20일부터 4월 7일까지 서울 마포구 동교동 제이94(J94) 갤러리에서 열린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60여편,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00여편,  2019년 10월 ~2023년 4월 매일경제신문에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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